교단헌법제정

교단헌법제정

교단 헌법 제정

한편, 교단의 초석이 되는 헌법은 1953년 교단 창립 당시 미국 하나님의 성회 헌법에 준한 중앙집권제의 헌법을 제정하여 유지해 왔으나 해마다 수개 조항(條項)을 삭제, 수정, 또는 보충 보완하므로 헌법의 균형이 깨어져 유지할 수 없게 되자 1969년 제 18차 정기총회시 헌법 전면 개정을 가결하고 헌법위원을 선정하였다. 위원장에 지승권 목사, 서기 박광수 목사, 위원에 석상회, 조명록, 박정근, 윤두선, 김진환 목사를 선임하였으며 이들을 통해 개정안 작성을 위촉하였다.
교단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는 가운데 1969년 7월 5∼11일까지 서대문 소재의 순복음중앙교회에서 FEAST(극동 아시아 하나님의 성회 대회)를 개최하여 아시아에 있는 각국 하나님의 성회 교역자들과 성도들이 운집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회를 열었다. 그때 마샬군도의 망잉이 王(하나님의 성회 신자)이 참석하였다.
▶ 1969년 7월 5일부터 11일 까지 서울에서 열렸던 동북아시아 대회 모습
이즈음 한국교회는 "하나님 선교"에 대한 의식이 차츰 현실참여로 눈뜨게 되어 4·19를 치루고 난 교회는 대사회적인 선구자 입장에서 교회의 소리를 드높였다. 군사정권을 향하여 민간이양을 강력히 요구하고 한일협약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고 240여 교계 지도자급들이 모여 구국기도회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 9월 14일, 공화당 정우회 소속의원들이 국회 제 3별관에서 새벽 2시에 야당없이 3선개헌안 국민투표법안을 날치기로 가결하고 10월 17일 국민투표에 부쳐 개헌안이 찬성 65.1 %로 통과되자 한국교회는"신의(神意)에 빗나갈 뿐만 아니라 그 강행방법이 비민주국가를 방불케 한다"는 NCC측의 개헌반대 성명과는 달리 "강력한 지도체제를 환영한다"는 NAE계의 정치적 발언으로 결국 한국교회의 불일치(不一致)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미래에 도전하는 현대 역사는 항상 이렇듯 불균형을 동반한다.
1971년 4월 27일, 제 7대 대통령에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는데 서울대 학생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현금의 정치적 불안을 사랑과 화해로 타개하자고 호소하였으나, '사법파동' '항명파동'등 불안이 더욱 고조되자 정부는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였으며 해방이후 최초로 전국 민방공훈련을 실시하였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교회는 사회참여를 통한 민주화운동의 저항으로 진통을 않게된다. 이 때도 역시 보수와 진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은 교회론 시비로 비화되며 눈에 띄게 드러났고 '하나님 선교'에 입각하여 대정부 투쟁을 벌이던 목회자들이 박해와 옥고를 치를 때, 교회 일각에서는 오히려 그들을 용공주의자(容共主義者)라고 몰아붙였다.1973년 부활절 예배에서 내란내비음모 혐의로 박형규, 권호경 목사가 구속되었고 한국신학대학 김정준 학장 외 교수 전원이 양심상 현시국을 좌시할 수 없다고 삭발하기도 하였다.

아주사 거리 부흥운동

20세기 벽두에 성령 세례를 허락하신 것은 '말세에 늦은 비 성령을 부어 주시리라'는 예언이 적중한 것이니(욜 2:23), 초대교회에 이른 비가 내린 후 19세기까지는 별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20세기가 밝아오는 1월 1일 새벽에 성령의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야말로 20세기가 늦은 비 성령의 시대이며 또한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시대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20세기 성령운동의 진원지 토페카시에서 발생한 이 불길은 들불처럼 퍼져나가 그 해에 칸사스, 오크라호마, 미조리, 텍사스주에 퍼지게 되었으며, 1906년에 캘리포니아주의 로스엔젤레스에서 강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파함은 1905년에 휴스톤에 또 하나의 신학교를 설립하여 복음적인 전도자를 양성하였는데, 윌리암 셰이모어(William J. Seymour)가 성령세례를 받아 오순절적인 전도자로 전환되었으나 그가 속해있는 교단에서는 설교할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러자 그는 어떤 굴레에 매여 복음을 바로 전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자유스러운 입장에서 복음 그대로를 설파함이 옳은 것이라 믿어 1906년 로스엔젤레스 아주사(Azuza)거리에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저 유명한 1906년의 아주사의 성령운동이다. 부흥회는 1주간이나 또는 1∼2개월에 끝나는 집회가 아니었으며, 7년간이나 계속된 새로운 차원의 부흥회였으니 이 집회는 어떤 프로그램도 없었으며 찬양이나 광고도 하지 않았고 폐회선언도 없었다. 만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찬미하며 기도하고 설교하며 매일 밤낮 쉬지않고 모이고 또 모여 은혜를 받았다. 날마다 성령의 은사가 강하게 나타났고 그 결과 이 소문이 사방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성령을 받았으며, 그들은 다시 제 고장으로 돌아가서 성령운동을 일으켰다. 캘리포니아, 시카고, 캐나다, 뉴욕, 죠지아, 프로리다 등지에서 오순절운동이 속속 전개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무렵에 노르웨이, 스웨덴, 독일, 한국 등지에서도 성령의 강한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평양에서 일어났던 1907년도의 부흥 동을 그 실례로 들 수 있겠다.

한국 오순절 교회와 통합

한국교회가 이렇듯 수난의 역사 속에서 십자가를 민중의 지팡이로 내세우는 동안 하나님의 성회는 1972년 10월 24일 오전 10시 임시총회를 갖고 오순절 총회와 전격통합을 하게 된다. 이에 앞서, 8월 28일 서울역 그릴 소회의실에서 양측교단 통합추진 전권위원들이 참석했는데 하나님의 성회에서는 박정근, 정두영 목사, 오순절 총회측에서는 강성숙, 신범하, 박정열 목사였다. 오순절 총회측 강성숙 목사의 개회기도로 시작된 동(同) 위원회는 그 동안 양측 교단의 분열이 흩어진 형제의 헤어짐같이 마음 아픈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다시 하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천명하기에 이르렀고 다음과 사항을 결의 하였다. ⑴통합총회는 하나님의 성회 헌법을 모법으로 한다.(단, 헌법 서문에 허 홍 목사에 관한 사항을 삽입한다)
⑵교역자 문제 : 양 교단 교역자는 통합과 동시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⑶현 하나님의 성회 임원을 그대로 숭인하고 오순절 총회측에서 한 사람을 실행위원으로 한다.
⑷허 홍 목사를 교단 원로목사 및 명예교수로 추대한다.
⑸신학교 문제 : 오순절총회 신학생을 동일 학년으로 하나님의 성회(순복음신학교) 신학교로 편입시킨다.
⑹통합총회 시기와 장소 및 총회원 성수
①통합총회의 시기는 10월 중으로 한다.
②장소는 대조동 순복음교회로 한다.
③통합총회의 성수는 출석회원으로 한다.
▶ 1973년 여의도로 이전하여 세계제일 큰교회로 부흥한 여의도 순복음교회
이로써 하나님의 성회 창립 멤버였던 허 홍 목사는 1956년 교단을 떠난지 16년만에 복귀하여 본교단의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순복음중앙교회의 여의도 이전과 국제적인 집회

한편 정부의 비상사태가 계속되는 동안 매사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다다르고 있었다. 학생들의 데모사건으로 불안이 고조되고 유류파동으로 인해 일상생활에 서민들이 위협받았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4년 8월 15일 일본 조총련계열의 문세광(文世光)이 육영수(陸英修)여사를 저격한 사건이 터졌다. 이즈음 한국교회는 1973년 5월 30일∼6월 3일까지 "오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슬로건 아래 5·16 광장에서 1백만명이 넘는 신도가 모여서 빌리 그래함목사를 초청하여 전도대회를 가졌다. 그리고 다음 해에 전년도를 능가하는 신도가 모인 가운데 5·16광장에서 '엑스폴로 74대회'를 가져 민족복음화의 불길을 높였다. 대학생선교회(대표 김준곤 목사)주관으로 열린 '엑스폴로 74대회'에서 개인전도 및 사랑방 전도방법을 배운 한국교회는 민족복음화의 소망을 갖게 되었고, 한국교회 부흥사들은 '빌리 그래함전도대회' 와 '엑스폴로 74대회'등 두 맘모스 대집회를 치루었으며, 다시'77민족 복음화성회'를 여의도광장에서 개최했는데 연인원 300만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1977년 5월 16일, 제 26차 정기총회로 모인 하나님의 성회는 총회를 통해 재단법인 정관변경 개헌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관심의 초점(焦點)이 되어오던 여목사제도는 찬성 77표, 반대 38표, 기권 9표로 부결되었고, 이 총회를 통해 근 10여년간 교단을 이끌어오던 총회장 조용기 목사가 사퇴하였다. 박정근 부총회장이 총회장 직무대리를 맡게 되었으며, 제 27차 정기총회를 통해 박정근목사는 147표를 얻어 18대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때에 신학교를 군포로 옮기고서도 당국으로부터 인가를 얻지 못한 이유와 순복음중앙교회에 8천만원을 채용해주고 선교센타, 기념관을 지었는데도 채용금을 받지못한 이유등으로 임원들이 책임추궁을 당했는가 하면, 그 총회에서 총회임원 임기는 1년으로 하되 지방회장은 2년까지 연임할 수 있다는 골자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스토로브리지 선교사 농아선교를 꽃피움

1979년 제 28차 정기총회를 통해 선교부 대표 버드필드 목사와 2년간 100교회 개척을 위해 한 교회 당(當) 1백 5십만원씩 지원한 마일스 선교사, 10년간 평택농아고아원 원장으로 어린이를 돌본 스트로브릿지 선교사를 표창하기에 이른다.
1979년, 6월 29일 미국 제 39대 대통령 지미·카터집사가 내한, 2박 3일 동안 체류하면서 박정희 대통령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에 있어서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한 및 미국의 '삼당국회의'를 제의하였으며, 교계 지도자들과 만나 선교 및 상호 관심사를 논의하고 돌아갔다. 그는 한국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으며 주일예배를 여의도침례교회에서 드렸다. 지미 카터대통령은 박대통령에게 분명하게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불과 4개월 뒤 비극의 10·26 사태를 당하게 된다.
집권 18년 동안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와 경제부흥을 위해 소위 개발독재를 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서거하자 온 국민은 경악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고, NCC를 비롯한 각 교단, 기관단체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충심으로 애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전국교회와 국민들에게 국가안전과 평화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당부했으며 정부는 비상사태를 간파, 즉시 계엄령을 전국 일원에 선포하였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에 앉았다.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제 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최대통령은 당선 직후인 12월 7일 대통령 긴급조치 제 9호의 해제를 선포하여 민주인사들의 복권 및 해금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나라는 그 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요구를 한꺼번에 발산하여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처하게 되었고 춘추전국시대를 방불하는 三金氏의 정치공세, 그리고 사북사태, 학생시위 등은 육군 소장인 보안사령관 전두환, 노태우 등 정치군인들에게 정권을 가로챌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 12·12라는 군부내 하극상(下剋上) 사건이 일어나 정치일정이 이미 전두환 등 정치군인의 손에서 돌아가고 있었으나 이를 눈치채는 사람은 적었다. 해가 바뀌어 1980년 5월 18일, 마침내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온 도시가 마비되고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으며 진압군과 시민이 대치하여 여느 전쟁 못지 않는 인명(人命)과 재산의 피해가 속출하였다.

80년 민족을 위한 금식기도

이미 위기(危機)는 감지되고 있었던 바, 사태가 일어나기 두 달전,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민족의 상처를 고쳐주소서"라는 주제로 '전국 교역자 구국금식기도회'를 1980년 3월 3일부터 6일까지 오산리기도원에서 개최하고 나라와 민족이 당면한 위기를 하나님께서 건져주십사고 합심하여 기도하였다.
1980년, 제 29차 정기총회에서는 27개의 헌법 개정안을 심의한 결과 관심의 대상이 된 부총회장을 2인제로 하자는 안을 통과시킨 후, 임원선거에서 총회장에 조명록 목사, 제 1부총회장에 문정렬 목사, 제 2부총회장에 박광수 목사, 총무에 김진환 목사가 각각 선출되었다.

교단 30주년 기념대회

동년(同年) 8월 25일부터 28일까지 여의도선교센타에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라"는 주제로 제 3회 '전국 교역자 세미나'를 개최하였으며, 그 날 열린 실행위원회에서는 다음해 4월에 '교단 창립 30주년 기념대회'를 갖기로 하고 대회조직을 확정 발표하였다.
▶ 박광수 목사의 축도
▶ 교단 30주년 기념대회
1981년은 교단역사에 있어서 변화가 극심하였던 한 해다. 어느 때보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교단 30주년 기념대회'를 성대히 가졌는가하면, 그 행사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교단분열이라는 혼란의 와중에 휩싸이게 된다.
그 해는 1953년에 교단이 창립된 후 정확히 28주년이지만 왠일인지 앞당겨서 그 행사를 치루려고 하였다. 당시 총회장이던 조명록 목사는 재임기간 중에 무언가 큰일을 이루고자하는 의욕이 높았는데 총회회관을 신축하는 한편, 교단 30주년 기념대회를 가져서 교단 창립 이후, 가장 분위기가 좋은 이 때에 교단의 역량을 결집하여 한국교계에 위상을 높이려고 했던 것이다. 교단 3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사업이 일어났는데, 교단 중진 목사들의 설교모음집이 「성령의 횃불을 드높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교단창립 이래 역사를 정리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30년사」라는 연감집(年鑑集)이 기념대회 개최일에 맞추어 나왔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역작(力作)이랄 수 있는 것이었다.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순복음중앙교회(이하, 여의도순복음교회로 통일)에서 열린 동(同) 대회는 "성령의 횃불을 드높이"라는 표어 아래,
①지속적인 성령운동울 전개하는데 주도적 위치를 지키기 위하여
②교단 총화와 힘을 국내외 선교에 집약하기 위하여
해외교역자를 비롯, 700여 국내 교역자와 30만명의 성도들이 참가하여 낮에는 교역자세미나 등 각종 세미나를 개최하고, 밤에는 부흥회를 열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교단의 화합과 결속력이 뛰어났고 그 결과도 흡족하였다.
▶ 여의도 순복음교회 얖에서 30주년 기념대회에 참가한 교역자들(198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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