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순복음신학교의 발전과정과 교단신학교
1953년 4월 8일, 교단설립과 동시에 신학교도 개설(開設)하였는데, 그것은 일찍이 교단지도부가 오순절적인 신학교육을 통한 견실한 목회자를 양성함으로써 교단발전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단 창설과 동시에 용산구 한강로1가 65번지 남부교회 내에 신학교를 개설하고 학생을 모집하였는데, 우선 타교단에서 오순절신학을 배우기 원하는 사람을 받아서 6개월 정도의 과정으로 수료하였다. 이 때 장로교의 목사였던 김상호 목사가 이 특과를 수료하고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목사가 된다.
53년 8월 1일, 신학교 교사(校舍)를 교통편이 더 좋은 서대문구 충정로1가 21번지(현재, 삼성강북병원 자리) 박성산 목사가 개척한 서부교회 내로 옮긴다. 그리고 미(美)하나님의 성회가 한국을 선교집중국(宣敎執中國)으로 지정함에 따라, 신학교를 위하여 대조동에 약 1만평의 대지를 사들였으며 버드 목사를 통해 2백 5십만원, 세계복음화운동기금 4백만원 등이 모금되었고 1960년 3월 5일 신축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61년에 완공하여 신학교를 거기로 옮기고 대조동 시대의 막을 열게 된다.
교단이 발전하면서 많은 신학지원자가 몰려오고 학교는 급속히 발전하였다.
한국사회가 경제가 부흥되면서 고학력의 실력있는 지도자를 요구하고 타교단에서는 교단신학교를 문교부로부터 인가받아 신학대학들로 발전해가고 있는 추세에 있었다. 그러자 순복음신학교도 대학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요구가 학생들로부터 일어났고 70년대 들어서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구체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당시 신학교는 운영상 미선교부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고 교장은 미국 선교사들이 맡고 있었다.
그러나, 70년대부터 난립하는 무인가 신학교 등 교육기관 단속에 순복음신학교도 그 대상이 되는 수모를 받자, 학생들은 신학대학 인가를 위해 금식기도를 하며, 미온적인 학교 당국자와 교단본부를 대상으로 투쟁을 했다. 그결과 학교 당국과 총회 집행부 그리고 조용기 목사로부터 대학인가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70년대에 수도권 인구집중 문제가 심각하여 정부는 절대로 수도권에 대학을 인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학인가에 따른 요구조건이 너무나도 까다로왔다. 차라리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게 현실이었다. 순복음신학대학으로 가는 첫 걸음으로 1976년 5월 16일에 순복음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구성하고 기성회장에 조용기 목사를 선임하였으며, 학생들은 나름대로 순복음신학대학인가 학생모금 추진위원회(위원장: 한문수, 서기: 최성규)를 구성하여 그 어려운 학생들의 호주머니에서 1천만원 가량이 모금되었다. 이사회에서는 안양에 사둔 임야가 신학대학으로 적절치 못한 것으로 판단, 일부를 매각하여 1977년 12월 8일에 군포시 당정동의 임야 20,981평을 구입하였다.
군포 신축교사 준공시 (77년12월8일)
1978년, 여의도교회 헌금으로 강의실 1동 766평을 건립하게 되었고 주간부가 그리로 옮겨 공부를 하였으나 여러 가지 불편이 따르게 되고, 잠깐이지만 다시 대조동으로 복귀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러다가 1981년 12월 26일에는 문교부로부터 "순복음신학원"이라는 학교법인 설립인가를 받고 이사장에 박정근 목사, 부이사장에 임동욱 장로가 취임하였다. 이어서 1982년 12월, 문교부로부터 4년제 신학교(각종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낭보였으나 교단분열과 그로 인한 운영난 문제로 걱정이 앞서기도 하였다. 초대학장에는 아더 씨 숄티스(Arthur C. Sholtis) 박사가 취임하였다.
순복음신학대학 신축 조감도
1977년 12월 8 본관건물(766평)을 준공하고 준공기념식을 가졌다.조용기목사가 설교
총회 실행위원회에서는 학생들의 2중 모집에 따른 학교의 약화가 우려되어 대조동신학교는 야간부만 학생을 모집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나 군포신학교는 시설이 태부족한 가운데 수업을 시작한터라 학생의 불만은 커져 데모가 빈발하였다. 본관건물만 하나 덩그마니 서있고, 더 이상 진척되지 않은 마스터플랜은 빛이 바래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1985년 1월 8일, 문교부로부터 4년제 정규대학교로 인가가 났다. 선배들이 이 날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해왔던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인가는 문교부가 요구하는 시설기준을 연도별로 채워나가야 하는 엄청난 경제적 부담도 수반하였다.
마침 박정근 이사장의 4년 임기가 끝나는 시점이었다. 학생들은 학교발전을 위하여 재력을 갖춘 새이사장을 요구하였고, 일부 이사들도 이에 수긍하면서, 교단이 분열된 상태는 별개의 문제로 학교발전을 위하여 조용기 목사를 제 2대 이사장으로 선임하게 되었다.
당시 이 결정은 오직 신학교의 발전만을 위해서 내린 것이었지만, 교단의 통합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분열은 되었으나 오순절신학이라는 신학의 모태(母胎)는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며, 목회일선은 나누어져 있지만, 신학을 하는 후배들은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학교의 입학식, 학위수여식 등 이런 저런 일로 총회 지도부와 조용기 목사가 자주 만나는 창구(窓口)가 되었고 억지스러운 비유 같지만, 별거한 부모가 자식 때문에 만나다보니 다시 재결합하는 것처럼 순복음신학대학은 교단 통합을 이루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1985년 이름까지 달리한 예수교대한하나님의 성회가 탄생하므로 완전한 분열로 판단한 서대문 총회는 교역자 수급이라는 문제 때문에 야간부만 남았던 대조동 신학교에 다시 주간부를 병설하였고 교단의 정통성, 신학교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순복음신학교의 원류(原流)를 그대로 이어받은 바로 그 "순복음신학교"라고 하였다. 바로 이 때, 특기(特記)할 일이 발생했다. 군포에 순복음신학교가 인가되고 운영되면서 학교제반서류(특히 1981년 까지 입학한 학생들의 학적부)가 대조동에서 군포로 옮겨갔다가 다시 대조동 신학교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